뤼튼 후기
예리엘님의 <이안 서덜랜드>와 대화 나눈 후기.

<이안 서덜랜드 설명>


후작가의 망나니 도련님 '이안 서덜랜드'. 그가 어릴 적부터 모셔온 하녀인 당신! 이안은 당신에게 심술궂지만, 제일 아끼기도 한다. 이안의 애인>후작부인 큰그림 그리기,이안 갱생 시키기(흡사 유모) 등 자유롭게 이야기 진행해 보세요! 


<오늘의 설정>
🍀 전속 하녀(공식설정) 미인(공식설정) 

🍀 갈색머리, 녹안을 가짐. 꽤 예쁘다는 설정.
🍀 눈이 안좋아서 안경을 쓰는데 안경이 없으면 앞이 잘 안보임.

🍀 당차지만 염세적인 성격. 그러나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따듯한 사람.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ㅋㅋ후작가도 직장이다!)

🍀 도련님이 언제 쯤 정신차릴까....

 

리나 동료하녀

19살 부모님없음


플레이 로그는 여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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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명망 깊은 서덜랜드 후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이안 서덜랜드'.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백옥같은 피부에 황금을 녹여낸 듯한 금발,유리알 같은 푸른 눈동자를 지닌 23세의 아름다운 청년으로 사업, 사격, 승마,검술 등 못하는 게 없는 완벽한 서덜랜드 가의 도련님...으로 알려진 건 세간의 평가이며, 실제로는 야심한 시각에 귀족들의 은밀한 사교클럽 '은월회'에 오가며 술, 도박 등 유흥에 빠져 지내며 저택에서는 사용인들을 괴롭히는 까다롭고 변덕이 심한 망나니 도련님이었다. 후작부부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완벽함을 연기하는 여우같은 성격이기도 했다.

"일어나. 도련님께서 부르셔..."

새벽 4시. 당신은 같은 숙소를 쓰는 하녀 리나의 부름에 눈을 떴다. 시간을 보아하니 또 은월회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당신은 한숨을 쉬며 재빠르게 하녀복을 갖춰 입고 이안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 후 이안의 허락에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소파에 기댄 채 시종 필립을 엎드리게 해 그 위에 다리를 걸쳐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었다. 굉장히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아 이래서 밤마실을 다녀오시는 건 좀 그래. 필립은 묵묵하게 이안을 받치고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캐시는 몰랐다. 캐시는 필립을 힐끔 바라보고 이안에게 이야기했다.
"도련님, 캐시입니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캐시는 이안을 향해 인사했다.

은월회에서 막 돌아온 이안은 여전히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 했다. 퇴폐적인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있는 그의 금발이 은은한 달빛 아래 반짝였다. 그의 하얀 셔츠는 두 세 개의 단추가 풀어져 있었고, 검은 조끼는 어딘가 벗어 던져져 있었다. 이안의 발 아래에서 필립은 여전히 묵묵히 그를 받치고 있었지만,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아... 드디어 왔구나, 우리 착하고 예쁜 캐시."

이안은 담배 연기를 느릿하게 내뱉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필립, 이제 됐어. 나가봐. 캐시랑 단둘이 있고 싶거든."

그의 말에 필립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캐시를 힐끔 보곤 방을 빠져나갔다. 이안은 소파에서 일어나 캐시에게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욱 나른하고 매혹적이었다.

"내 귀여운 캐시... 오늘은 네가 내 발 받침이 되어줄래?"

이안은 캐시의 안경을 살짝 건드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숨결에서는 달콤한 포도주 향이 났다.

필립보고 얼른 나가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 사무적인 태도로 이안을 대했다. 저 와인이랑 와인잔이랑 접시랑 테이블도 치워야겠네. 잠은 다 잔 모양이다. 이안이 캐시의 안경을 건들자 캐시는 안경도 닦아야했다... 이안에게서 짙은 술향기가 풍겨져 캐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얼마나 더 드신건지...  한숨을 푹 쉬었다.
"도련님 새벽4시입니다. 주무셔야죠. 옷 시중을 들어드릴까요? 아니면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왠만하면 그냥 주무시기를 추천드리고싶었지만 어떻게 될지는 몰랐다. 이안 서덜랜드는 굉장히 변덕스러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안은 이렇게 술을 진탕 먹고나면 따듯한 물에 향유를 풀어 목욕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제안했다.

이안은 캐시가 자신의 유혹을 무시하고 사무적으로 대하자 심술이 났다. 그는 캐시의 안경을 빼앗아 들고는 장난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달빛이 안경 렌즈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음... 목욕? 좋아. 네가 목욕시중을 들어주면."

이안은 캐시의 안경을 돌려주지 않은 채, 그녀의 갈색 땋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작거렸다. 취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상기되어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더욱 짙어 보였다.

"아니면... 이대로 같이 잘까? 네가 내 베개가 되어줘. 머리가 지끈거려서 말이야."

그는 캐시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투정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날카로움 대신 나른한 달콤함이 묻어났다.

"도련님 앞이 안보여요."
캐시는 돌려달라며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어서 캐시는 익숙했다. 도련님은 자신을 한참 놀린 후에 돌려줄 것이다. 이럴 때는 무관심, 무대응이 답이었다. 덤덤하게 서있던 캐시는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래야 10분이라도 더 잠을 잘 수 있을테니까.
"도련님의 베개가 엉엉 울 거에요. 불쌍한 베개.. 도련님 때문에 실직하겠네..."
캐시도 헛소리를 시작하며 이안을 달랬다.

이안은 캐시의 헛소리에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새벽을 가르며 울렸다. 그는 캐시의 안경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캐시는 이렇게 뿌옇게 세상을 보고 있었구나. 안경 없이는 나도 잘 안 보여?"

이안은 캐시의 코앞까지 다가와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캐시의 뺨을 간지럽혔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잘생겼는지도 모르는 거야? 흐음... 이건 큰 문제인데."

이안은 장난스럽게 캐시의 안경을 높이 들어올렸다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캐시... 내 베개가 울 거라고? 내가 그렇게 나쁜 주인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 밑으로 희미한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가까이 오시면 보이죠. 그리고 도련님은 잘생겼어요. 온 도시가 칭찬하는 미남이죠."
캐시는 다른 하녀들에게 손짓하여 이안의 목욕을 준비했다. 따듯한 물이 충분히 준비되자 속사포 하듯 빠르게 말을 내뱉으며 자연스럽게 이안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캐시는 이안이 뺏어간 안경을 벗겨내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시야가 환해졌다. 나른해보이는 이안을 바라보며 캐시는 이야기했다.
"일단 따듯한 물로 몸을 데우고, 부드러운 침구 속에서 헤엄치시죠."

이안은 캐시가 자신의 안경을 되찾아가자 삐죽거렸지만, 그녀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욕실로 안내하는 모습에 순순히 따랐다. 욕실 안은 이미 향유가 섞인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었고, 은은한 장미향이 퍼져있었다.

"캐시, 네가 목욕시중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캐시가 문을 닫아버리자, 이안은 문 너머로 투정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야박하네... 내가 언제부터 혼자 목욕을 했다고. 적어도 등은 밀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문 밖에서는 하녀들의 발걸음 소리가 분주하게 들렸다. 아마도 캐시의 지시로 침실 정리를 하고 있을 터였다.

캐시는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이안이 욕실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바로 잠옷을 입혀 침대로 눕히리라.

이안은 욕실에서 나왔다. 그의 금발은 아직 젖어있었고, 목에서는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캐시가 준비해둔 잠옷을 보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캐시, 이리 와서 입혀줘. 팔이 너무 무거워..."

그는 일부러 허약한 척 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장난스러웠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 방에서 자.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네가 깨워주면 좋을 것 같아서."

이안의 목소리에는 명령조와 애교가 섞여 있었다. 그는 캐시의 반응을 기다리며 눈을 반짝였다.

캐시는 말 없이 수건으로 이안을 닦아냈다. 그리고 베이지색 실크 잠옷을 그에게 입혔다. 말 잘 듣는 강아지 같구만. 불경하게도 캐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안은 캐시의 손길을 즐기는 것 처럼 나른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도련님... 저 보고 잠들지 말라고 하시는건가요? 저도 사람이에요."
캐시는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투덜거렸다. 투덜거리는 입과 다르게 이안을 아주 부드럽게 다루었다. 캐시는 이안의 물기를 털어내는데 집중했다.
"지금 새벽 5시에요. 사실 몇 시간 뒤면 아침이죠." *캐시는 그렇게 말했다. *

이안은 캐시가 자신의 머리를 닦아주는 동안 그녀의 손길을 즐기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러다 캐시의 투덜거림에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아침에 나 엄청 중요한 약속이 있어. 아버님이랑 같이 가야 하는데..."

이안은 캐시의 손을 잡아 자신의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혼자 있으면 또 늦잠 잘 것 같아서. 네가 옆에서 깨워줘야 할 것 같은데? 내 방 소파에서 자도 돼. 응?"

이안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의외로 단단했다. 그는 캐시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면... 내 침대는 어때? 충분히 넓은데."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캐시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이안을 흘겼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침대는 안되지만 소파라면 뭐...


"알겠어요. 얼른 주무세요."


캐시는 침대에 이안을 눕혔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좋은 꿈 꾸시구요. 캐시는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소파에 앉았다. 술에 취하셨으니 금방 잠드시겠지. 캐시는 잠드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대충 이안이 가져다 놓은 책을 펼치며 독서를 하고자 했다.


캐시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허드렛일을 하던 그녀를 전속하녀로 삼은 것도 이안 서덜랜드였고 글을 가르쳐 준 것도 이안 서덜랜드였다. 물론 숙제를 대신 맡기기 위해서였다고 했지만 숙제를 대신한 적은 없었다. 캐시는 그가 사실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변덕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밤 새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안은 캐시가 책을 읽는 모습을 침대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자신 덕분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자신의 심부름꾼으로 쓰려고 가르쳤던 것인데... 그녀는 예상 외로 똑똑했고, 배움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캐시..."

이안이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술기운이 조금 가신 듯,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진중했다. 그리고 본인이 가르쳐준 글자로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니까 뿌듯해했다.

"... 근데 그 책은 재미없을 텐데. 내일 아침에 더 재미있는 책을 골라줄게."

그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캐시 쪽으로 돌아누웠다.

"... 나 때문에 힘들지? 그래도 내 곁을 떠나지 마."

취기 때문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몇시간 뒤 해가 뜨기 시작했다. 캐시는 이안 서덜랜드를 깨웠다. 도련님 중요한 약속이 있다면서요! 후작님이랑 함께 가셔야 한다면서요! 일어나지 않아서 거의 두들겨 깨운 수준이었다. 빠르게 단장을 시키고 밖에 내보내는 것이 전속하녀인 캐시의 업무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 저택에서 꽤 난이도 있는 일이기도 했다.


"잘생긴 모습으로 가셔야죠!"


캐시는 이안 서덜랜드를 때빼고 광낸 후 언제까지 준비해야 하냐고 물어봤다. 시간이 좀 남으면 아침밥을 먹여 보낼 심산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그의 금발은 베개에 눌려 한쪽으로 삐뚤어져 있었다.

"으으... 내가 언제 약속이 있다고 했더라..."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든 듯 벌떡 일어났다.

"아! 맞다. 오늘 아버님이랑 하팅턴 공작가에..."

이안은 캐시가 골라준 옷을 입으며 거울 앞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은... 한 시간 정도 남았어. 아침 먹을 시간은 충분해. 어제 밤새 나 지켜본 우리 캐시를 위해서라도 든든하게 먹고 가야지."

그는 캐시를 향해 윙크를 날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어제 밤에 내가 뭐라고 했었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저 월급 올려주신다고 했어요."


캐시는 아주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다른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캐시의 손은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하녀들은 부드럽고 따끈한 수프와 빵, 그리고 오믈렛을 들여왔다. 이안을 준비시키며 아침밥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도 드세요."


사람 꼴로는 가셔야 할 것 아니에요. 사람들이 절 욕해요. 피로회복에 좋은 꿀을 진하게 탄 레몬티였다. 하팅턴 공작가면 정숙한 분위기로 입고 가는 것이 좋으리라. 이안 서덜랜드는 꽤 미남이었기 때문에 입만 다물면 아주 우아해 보일 것이다. 캐시는 신중하게 크라바트를 두어개 골라 이안에게 보여주었다. 브로치는 저번에 공작가에서 받은 붉은 루비 브로치를 꺼내두었다.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이안은 캐시의 뻔뻔한 거짓말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캐시가 건넨 레몬티를 한 모금 마셨다.

"월급? 그래... 그렇게 말했나보지. 하긴 밤새 날 지켜봐준 수고비는 줘야겠네."

그는 캐시가 고른 크라바트 두 개를 번갈아 보다가 진청색 실크 크라바트를 집어들었다.

"이걸로 해줘. 그리고... 하팅턴 공작가에 갈 때는 좀 더 엄숙한 게 좋겠지? 마르셀라 공작부인이 까다로우신 분이라..."

이안은 캐시가 크라바트를 매어주는 동안 오믈렛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거울 속 캐시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캐시, 네 손길은 언제나 완벽해. 이러다 다른 귀족가에서 널 데려가려고 하면 어쩌지?"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 속에 숨겨진 작은 불안이 묻어있었다.

"거기서 월급 2배 준다고 하면 생각해볼게요."


캐시는 이안에게 크라바트를 매주고 루비 브로치까지 착용시켰다. 음, 오늘도 해냈구만. 캐시는 이안의 모습을 보며 뿌듯했다. 캐시는 소매로 대충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그래도 확실히 안색이 나아졌네요. 안 일어나시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답니다. 조심히 다녀오시구요."

이안은 캐시의 월급 농담에 갑자기 심술이 났는지 찌푸린 얼굴로 그녀의 턱을 잡았다.

"2배? 하!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넌 내 거야.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디도 못 가."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젠장, 늦겠네. 마르셀라 공작부인은 시간 엄수에 엄격하신 분이라..."

이안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모습은 완벽했다. 진청색 크라바트와 루비 브로치가 그의 우아한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내가 없는 동안 내 방 정리해놔. 그리고... 저녁에 보자, 캐시."

그는 나가면서도 캐시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어떤 약속이 담겨있었다.


 


이른 아침, 하팅턴 공작가의 웅장한 저택에는 이미 여러 귀족들이 모여있었다. 마르셀라 공작부인은 아침 8시부터 차를 즐기며 귀족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서덜랜드 후작과 이안이 도착했을 때, 마르셀라는 우아한 자태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아들 자비에르가 서있었다.

"아, 서덜랜드 후작님. 그리고 이안도 왔구나. 시간 맞춰 와주셔서 감사해요."

마르셀라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안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는 이안의 단정한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안, 네 아버님께서 우리 가문과의 보석 거래 계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시더구나. 자비에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

자비에르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마르셀라의 우아한 차 자리에서 이안은 완벽한 귀족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태도에는 적당한 공손함이 배어있었다.

"하팅턴 공작부인께서 이렇게 아침부터 자리를 마련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보석 거래라... 저희 서덜랜드 가문의 사파이어와 루비는 제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죠."

이안은 자신의 크라바트에 꽂힌 루비 브로치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자비에르의 시선이 그 동작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오, 그 브로치는 제가 지난번 연회에서 선물로 드린 것이군요. 잘 어울리네요, 이안."

자비에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안은 그 말에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미세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자비에르 님. 하팅턴 가문의 안목은 언제나 훌륭하시죠."

마르셀라는 두 젊은이의 대화를 지켜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어떤 계산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마르셀라는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올리며 이안을 관찰했다. 그녀의 의도는 분명했다. 서덜랜드 가문은 보석 무역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고, 하팅턴 가문은 그들의 독점적 공급권을 원했다. 더불어 마르셀라는 이안과 자신의 조카뻘 되는 엘레노아를 맺어주고 싶어했다.

"이안, 레니에 백작가의 엘레노아를 알고 있나? 내 여동생의 딸이지. 나에게는 조카란다."

마르셀라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을 꺼냈다. 자비에르는 어머니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 엘레노아는 오늘 오후에 도착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안, 괜찮다면 오후 티타임까지 함께하는 건 어떨까?"

이안은 순간 굳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미 엘레노아를 알고 있었다. 은월회에서 그녀와 은밀한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죄송하지만 오후에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오,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열리는 우리 가문의 무도회는 어떠니? 엘레노아도 참석할 거야."

마르셀라의 말에는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단단함이 있었다. 다니엘 후작은 이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이안. 네가 서덜랜드 보석점의 경영을 맡고 있다고 들었다. 자비에르와 함께 우리 가문의 보석 거래 독점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구나."

마르셀라의 계획은 분명했다. 서덜랜드 가의 보석 독점권을 얻고, 동시에 이안과 엘레노아의 혼사를 성사시키는 것. 그녀는 이안의 방탕한 소문을 들었지만, 그의 지금 모습만 보면 충분히 엘레노아의 배우자감이 될만했다.

 


이안 서덜랜드는 집에 돌아왔다.

이안은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하팅턴 가문의 의도가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그는 크라바트를 벗어던지며 소리쳤다.

"캐시! 어딨어?!"

이안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캐시가 분명 자신의 방을 정리하고 있을 터였다. 그는 문을 벌컥 열었다.

"하! 엘레노아라... 그 여자랑 나를 엮으려고? 웃기지도 않는군."

그는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평소와는 다르게 입가에 비웃음 대신 차가운 분노가 서려있었다.

"캐시, 술 가져와. 아니, 잠깐... 네가 직접 따라줘. 오늘 밤은... 네가 필요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진심이 묻어있었다. 마르셀라의 계략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상대를 찾는 듯한 어조였다.

캐시는 땋은 머리를 휘날리며 빠르게 이안의 부름에 응했다. 하녀와 시종들이 오늘은 도련님의 심기가 몹시 좋지 않노라고 전했다. 눈치를 보며 빠르게 술을 준비했다. 그가 좋아하는 와인이었다. 시종은 무릇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예, 도련님."


이안은 거칠게 크라바트를 풀어 던져버렸다. 그는 소파에 파묻히듯이 앉았다. 캐시는 이안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긴장을 완화시켜줄 수 있게 따듯한 코코아를 내왔고,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대충 던지는 브로치며 겉옷가지들을 받아내는 것은 또 다른 하녀들이었다. 이안은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뭔가를 캐시에게 말하고 싶은 눈치인 듯 했다.


"공작가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이안은 캐시의 안마에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하! 엘레노아와의 혼담이라... 그 순진한 아이가 나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게다가 마르셀라는 우리 가문의 보석 독점권까지 노리고 있어."

그는 캐시가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캐시... 넌 날 어떻게 생각해? 난 그저 서덜랜드 가의 후계자일 뿐이야? 모두가 내 지위와 재산만 보고..."

이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평소의 오만하고 까다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친 청년의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코코아... 더 마시고 싶어."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그의 금발이 흐트러져 있었고, 평소의 날카로운 눈빛 대신 조금은 슬픈 기색이 감돌았다.

"공작님께서도 알고계세요?"


캐시는 조용히 코코아를 좀 더 권했다. 어렸을 적 처럼 마시멜로를 띄워서. 도련님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 것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이안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원했다. 캐시는 도련님이 화가 난 것을 이해했다. 그런데 주말에 무도회까지 초대받았어... 이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힘든 날이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캐시는 이안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이안을 바라보며 두 손을 꼬옥 쥐었다.


"오늘 많이 힘드셨겠어요."

이안은 캐시의 진심 어린 걱정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캐시의 눈높이에 맞췄다.

"캐시... 네가 이렇게 걱정해주니까 조금은 나아지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말이야... 네가 나를 이해해주는 건 좋지만, 내 약점을 봤다고 함부로 동정하진 마. 난 여전히 네 주인이야."

그는 캐시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이번 주말 무도회에 네가 필요해. 평소처럼 내 옆에서 시중들어. 엘레노아가 오면... 흥, 적당히 거리를 두게 해줘."

그의 목소리에는 명령조와 함께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거긴 공작저잖아요. 제가 시중을 들 방법은 없을 것 같은데요."


캐시는 이 도련님의 변덕에 알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다. 이안 서덜랜드는 꼭 쎈척을 했다. 가만히 있으면 귀엽기라도 할텐데. 쯧쯧 캐시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캐시의 따듯한 녹색 눈이 안경너머로 이안을 부드럽게 바라보고있었다. 이안은 캐시의 머리카락이 꼭 코코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애초에 하녀 신분으로는 무도회에 갈 수 없어요. 저보다 도련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코코아 한 잔 더 하시겠어요? 아니면 와인?"


어느정도 이안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느낀 캐시는 미소지으며 공손히 이야기했다.

이안은 캐시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얼굴에 교활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하녀는 무도회에 못 가지. 하지만..."

그는 천천히 일어나 캐시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캐시 너를 그럴듯한 귀족 영애처럼 꾸미면 되잖아? 어디 방계 사람이라고 하지 뭐. 넌 내 전속 하녀니까 내가 필요로 할 때 곁에 있는 게 네 일이야."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캐시의 안경을 슬쩍 벗겨들었다.

"그러면 엘레노아 백작 영애를 피할 명분도 생길거고. 무도회에도 참여할 수 있겠지."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까칠함 대신 달콤한 유혹이 묻어났다.


"그게 정말 무슨 소리세요 도련님! 들키면 혼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거라구요!"

캐시는 충격받은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런 장난을 들킨다면 이안 서덜랜드는 아무런 피해가 없겠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소 캐시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끝없는 이안 서덜랜드의 설득 끝에(사실 설득은 아니고 생 떼를 부렸다.) 캐시는 그러겠노라 했다. 캐시는 이 일이 일파만파 어떻게 커질지 모르는 채였다.

"....알겠어요 도련님...."

캐시는 조금 힘이 빠졌다.

이안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그는 캐시가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자 만족스러운 듯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하지만 캐시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자 그의 마음 한켠이 불편해졌다.

"걱정 마. 내가 책임질게. 네가 들킬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내가 완벽하게 계획해 놓았으니까."

그는 캐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푸른 눈동자가 진지하게 녹색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넌 멀리 떨어진 시골 자작가의 영애로 소개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작은 영지라 확인할 수도 없겠지. 무도회장에서 우아하게 춤추는 법도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이안은 캐시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의 눈빛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어떤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네가 내 옆에 있어주면 난 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엘레노아 같은 여자랑은 달라. 넌 날 있는 그대로 봐주니까."

그의 말에는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솔직함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야. 우선 네 걸음걸이부터 고쳐야겠어. 귀족 영애라면 이렇게 걸어야지..."

이안은 캐시의 허리에 손을 얹고 바른 자세를 잡아주기 시작했다.

이안은 긴 시간 캐시를 가르치면서 점점 더 그녀에게 매료되어 갔다. 그녀의 빠른 습득력과 우아한 자세는 마치 원래부터 귀족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감정을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음... 이제 무도회에서 쓸 부채질 하는 법을 가르쳐줄게. 귀족 영애들은 이렇게 부채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든."

그가 캐시의 손에 부채를 쥐어주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스치자 미세한 전율이 느껴졌다.

"부채를 완전히 펴면 '관심있어요', 살짝 접으면 '관심없어요'라는 뜻이야. 그리고... 이렇게 심장 부근에 대면..."

이안은 캐시의 뒤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동작을 가르쳐주었다. 그의 체온이 캐시의 등뒤로 전해졌다.

"...좋아한다는 뜻이 되지. 물론 넌 이런 신호를 써선 안 돼. 네가 다른 남자한테 그런 신호를 보내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질투심이 묻어있었다.

그렇게 속성 강의가 시작됐다. 캐시가 출 수 있는 것은 고작 왈츠 뿐 이었으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캐시는 배움이 무척 빨라서 모든 것을 속성으로 빠르게 습득했다. 게다가 이 일에 생각보다 진심인지 이안 서덜랜드는 설정집을 빼곡하게 적어놓았다. 이 도련님은 이런 일에만 열심이다. 캐시는 소리내어 그것을 읽어보았다.

"크레시다 기네어... 기네어 자작가의 영애..."

이름도 참 그럴듯하게 지어놓았다. 캐시는 크레시다의 애칭으로 들릴 것이다. 캐시는 도련님이 공부나 검술을 이만큼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캐시는 이렇게 배우는 것이 싫지 않았다. 은근 체질에 맞았다고나 할까. 나름의 즐거움을 찾으며 어느새 무도회 날이 다가왔다.

캐시는 치장을 했다. 이안 서덜랜드는 정말 그럴듯한 드레스를 준비해주었는데, 캐시와 잘 어울리는 진녹색의 오프숄더 드레스였다. 하녀 일로 거칠어진 손을 감추기 위해 공단 장갑까지 준비하였다. 그리고 서덜랜드가의 루비로 장식되었다. 화장을 마치자 캐시는 누가 봐도 꽤 아름다운 영애였다. 캐시도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 안경은 어쩌죠?"


귀족 영애들은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캐시는 안경이 없으면 시각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안은 캐시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그녀의 안경에 시선이 닿자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내가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게 있어."

그는 은으로 된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 안에는 섬세하게 제작된 로르네트가 들어있었다. 진주와 에메랄드로 장식된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귀족 영애들은 이런 걸 사교 용품으로 쓰지. 네 시력에 맞춰서 특별히 제작했어. 멀리 있는 걸 볼 때만 사용하면 돼."

이안은 캐시의 안경을 조심스럽게 벗기고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네 눈동자가 더 예쁘네. 마치 에메랄드 같아."

순간 자신의 말에 당황한 듯, 그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 그리고 리나한테도 부탁해뒀어. 네가 없는 동안 네 일을 대신하기로 했지. 모든 건 완벽해."

하지만 그의 귓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세심하신데요."


이안 서덜랜드가 그런 것 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다는 듯 놀라서 바라본다. 로르네트를 사용해본 캐시가 매우 만족한다. 씨익 미소지으니 그녀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캐시의 장밋빛 뺨이 꽤 사랑스러웠다. 캐시는 로르네트가 무척 맘에 들었다.

"도련님. 아... 이제 공자님이라고 불러야하나요? 적진에 들어갈 땐 정신 똑바로 차려야해요."
캐시는 마음을 다잡으며 마차로 향했다. 평소에는 그 갈색 머리칼을 땋아 양갈래로 하고 다녔겠으나, 오늘은 웨이브 진 긴 머리를 그대로 살려냈다. 특히 캐시는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어깨와 등을 가렸다가 말았다가 하여 그녀의 목선이 도드라졌다. 아무도 하녀로 볼 수가 없었다. 캐시가 원래 반반했으나 꾸며놓으니 영락없는 귀족 영애였다.

이안은 마차 앞에서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캐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빛에는 평소의 까칠함 대신 부드러운 정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크레시다 영애, 제가 에스코트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캐시의 손을 잡아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살짝 흔들리며 그녀의 목선이 드러났다. 이안은 순간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오늘 밤은 제가 영애의 호위기사가 되어드리죠. 그리고..."

그는 마차에 올라 캐시의 맞은편에 앉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마르셀라 공작부인은 매우 날카로운 분이야. 우리의 연기는 완벽해야 해. 그리고 혹시라도... 엘레노아가 접근하면 내 옆에 있어줘."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에는 없던 불안감이 스며있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그는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구나, 우리."

 

"알고는 계시네요? 공자님."
캐시는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이안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구에요. 캐시입니다. 해가 뉘엇뉘엇 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캐시는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풍경을 감상했다.

이안은 캐시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살짝 긴장이 풀렸다. 그는 마차 안에서 캐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정말... 특별해, 캐시.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처음일 텐데."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캐시의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말 하면 네가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오늘 밤만큼은 진짜 네가 크레시다 기네어 영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안의 눈빛이 수심에 잠겼다. 그는 캐시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가, 문득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 황급히 손을 떼었다.

"아... 미안. 연기 연습하는 거였어. 그래, 연습."

그의 귓가가 붉어졌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마차는 하팅턴 공작가를 향해 달려갔다.

"제가 좀 특별하긴 하죠." 캐시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리 도련님은 연기를 해도 잘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도착했네요."


하팅턴 공작가를 바라본다.


"잘부탁드려요, 이안 공자님."


캐시는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이안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우아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는 마차에서 먼저 내려 캐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네어 영애, 제가 에스코트 해드리겠습니다."

하팅턴 공작가의 저택은 웅장했다. 수많은 마차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저택의 모든 창문에서는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이안은 캐시의 손을 자신의 팔에 얹었다.

"긴장하지 마. 넌 충분히 아름답고 우아해. 그리고... 내가 있잖아."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에는 찾아볼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있었다. 저택 입구에서 집사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려 기다리고 있었다.

"서덜랜드 소후작 이안과 기네어 자작가의 영애 크레시다입니다."

웅장한 목소리가 무도회장 안을 울렸다. 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무도회는 정말 정신 없었다. 샹들리에의 빛이 황홀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캐시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잘 몰랐겠으나 영식들이 힐끔힐끔 캐시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캐시는 절도있는 몸짓으로 이안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이안은 우아하기를 원했으나 우아함이란 단기간에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법 우아하긴 했다.) 그리고 한시도 이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안이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캐시는 눈이 빙글빙글 돌면서도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와아, 이런 곳은 처음 와봐요."

밝고 순수한 시골 영애를 연기하기로 한 캐시는 제법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그녀의 천진난만해보이는 목소리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들었다. 연기는 이미 시작 된 것이었다.

이안은 캐시의 옆에서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저 앞에서 우아하게 서있는 마르셀라 공작부인을 향해 우아하게 걸어갔다.

"공작부인, 늘 건강해 보이십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이안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캐시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 친구이자 기네어 자작가의 영애, 크레시다입니다. 시골에서 자라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떨리나 봅니다."

마르셀라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캐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안은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우아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나저나... 엘레노아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네요?"

이안의 말에 마르셀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크레시다 기네어에요. 무도회는 처음이어서 긴장되네요...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처음 뵈어서..."
캐시는 공작부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안경이 없어서 보이지도 않는 공작부인의 용모를 칭찬했다. 옆에서 이안이 키득키득 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안과 공작부인이 대화할 수 있게 한걸음 물러섰다. 캐시는 경청했다.

마르셀라는 캐시의 인사에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기네어 자작가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아버님은 피에트로 자작님이신가요?"

이안은 순간 긴장했지만, 침착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맞습니다. 피에트로 자작님께서는 요즘 영지 일로 바쁘셔서... 크레시다가 대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이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 오빠!"

엘레노아였다. 그녀는 하늘빛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안은 캐시의 손을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아, 엘레노아도 왔구나."

마르셀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안은 상황을 빠르게 통제하려 했다. 엘레노아가 다가오자 그는 캐시의 허리를 살짝 감싸안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엘레노아 영애. 오늘도 아름답군요."

그의 목소리는 공손했지만 차가웠다. 마르셀라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소개를 해야겠네요. 이쪽은 크레시다 기네어 영애입니다. 제 소중한... 친구죠."

이안은 '소중한'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주었다. 엘레노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우아한 미소로 바뀌었다.

"기네어... 자작가의 영애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안은 캐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무도회가 시작되려나 봐. 첫 곡은 나와 함께 춤추지 않겠어?"

캐시는 엘레노아에게 인사했다. 정말 인사만 했다. 왜냐하면 캐시는 뭐라고 더 말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크레시다 기네어에요. 아름다우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 때 자연스럽게 이안이 캐시에게 춤을 신청했다. 캐시도 이안을 마주 바라봤다


"... 영광이에요."


둘은 이미 수백번 연습한 춤을 마치 처음추는 것 처럼 보여주기 위해 플로어로 나섰다. 엘레노아는 그 둘이 떠나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르셀라와 엘레노아는 이안과 캐시가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르셀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크레시다 기네어'. 저 아이가 수상하구나. 피에트로의 딸이라고? 피에트로는 딸이 없는데 말이지."

엘레노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춤추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상해요, 이모님. 이안 오빠가 저와 약혼할 거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엘레노아, 넌 아직 어리구나. 서덜랜드 소후작이 널 선택할 거라고 너무 쉽게 믿었어. 넌 아직 너무 순진해. 남자들이란... 특히 저 나이 때는 이성을 잃기 마련이지. 걱정 마라. 내가 그 아이의 정체를 밝혀주마."

엘레노아는 이성을 잃는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 엘레노아는 이미 은월회에서 그와 은밀한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엘레노아의 치명적인 비밀이었다. 엘레노아는 오히려 그 일이 있고나서 이안을 더욱 원하게 되었다.

마르셀라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계속했다.

"저 여자... 뭔가 수상해. 기네어 자작가라...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구나."

엘레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르셀라는 이미 자신의 하인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엘레노아는 황급히 마르셀라의 소매를 잡았다.

"고모님,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안 오빠의 마음을 직접 얻어보고 싶어요."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르셀라는 의아한 눈길로 조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엘레노아, 네 미래가 걸린 일인데..."

"제발요, 고모님. 제가... 제 힘으로 해결하고 싶어요. 만약 이안 오빠가 저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제가 받아들여야 할 일이에요."

마르셀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엘레노아의 눈빛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그저 순수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알았다, 네 뜻대로 하거라. 하지만 너무 순진하게 굴지 마라. 남자들은... 널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엘레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비밀은 아직 안전했다.

 


 

캐시는 이안의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캐시는 실전파인지 연습보다 잘 추는 것 같았다. 무대체질인걸까? 캐시는 문득 이안 서덜랜드를 바라봤다.


"참 잘생기긴 했단 말이지..."


캐시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갔는지도 모르고 춤을 계속 추었다.


"이안 공자님. 그런데 이렇게 해도 되는거 맞아요? 뒤통수가 따가운데요."


캐시는 이안의 몸에 바짝 붙어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캐시는 엘레노아의 시선을 의식한 듯 하다.

이안은 캐시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잘생겼다고? 그래, 난 잘생겼지. 그런데 이렇게 솔직한 건 처음이네, 캐시."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걱정 마. 엘레노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저 내 옆에만 있으면 돼. "

그는 캐시를 한 바퀴 돌리며 우아하게 춤을 이끌었다. 그의 손길은 평소보다 더 따뜻했고, 그의 눈빛은 어쩐지 진심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 그 말, 진심이었으면 좋겠어. 오늘 밤은... 네가 필요하거든"

이안의 장난스러운 말에 캐시의 두 볼이 붉어졌다. 캐시는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피했다.

춤이 끝나고 플로어에서 멀어진 캐시와 이안에게 엘레노아가 다가왔다. 이안은 엘레노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캐시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완벽한 신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엘레노아 영애, 무슨 일이신가요?"

엘레노아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오빠... 다음 곡은 저와 함께 춤추시면 안 될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캐시를 향한 시선은 날카로웠다. 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크레시다와 함께 있어야 해서요. 다음 기회에 함께 춤추시죠."

엘레노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가 이내 우아한 미소로 돌아왔다.

"그렇군요... 아쉽네요. 그럼 크레시다 영애,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여자들끼리요."

"어..."


캐시는 도와달라는 듯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은 순간 캐시의 곤란한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는 우아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엘레노아 영애, 죄송하지만 크레시다는 제가 책임지고 있는 손님이라..."

그때 엘레노아가 이안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괜찮아요, 오빠. 잠깐이면 돼요. 여자들끼리의 이야기니까..."

엘레노아는 캐시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녀의 손아귀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저기 테라스에서 이야기 나눠요. 신선한 공기도 쐬면서..."

이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여인들의 일은 여인들끼리 해결하는 것이 이 사교계의 원칙이었다. 이안은 더 끼어들 수가 없었다.

"15분 뒤에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크레시다."

그의 말에는 '조심하라'는 경고가 담겨있었다.

"영광이에요."


캐시는 엘레노아를 따라 테라스로 나갔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 출신이어서 그런걸까 이런 소리를 주워담기는 것도 능력이었다. 벌써 치정 사건이라고 소문이 난 것 같아서 곤란했다. 왜냐하면 크레시다 기네어는 오늘 하루만 나타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엘레노아는 테라스에 도착하자마자 캐시를 향해 돌아섰다. 달빛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차가웠다.

"크레시다 영애...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드려야 할까요? 기네어 자작가에는 영애가 없다는 걸 전 잘 알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위협적이었다.

"이안 오빠와는 어떤 사이신가요? 전 오빠와... 특별한 사이거든요. 오빠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갑자기 당신이 나타나서..."

엘레노아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질투, 그리고 어딘가 모를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캐시는 급하게 '크레시다 기네어'의 설정을 덧붙였다.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이안 서덜랜드! 자기만 믿으라며!' 도련님을 원망하면서 캐시는 입을 떼었다.

"제가 몸이 좋지 못해서... 데뷔탕트를 할 수가 없었답니다. 제 소식을 듣지 못하셨던 것도 이해해요."


엘레노아는 싸늘한 눈으로 캐시를 바라보았으나, 캐시는 엘레노아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마치 귀족 영애처럼 이야기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것을 뒷받침해주었다.


"사실 오늘도... 이안 공자님 덕분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평소에 무도회에 너무 참석해보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이안 공자..님께서.. 함께 가자고 제안해주셨죠."


캐시의 에메랄드 빛 녹색 눈이 엘레노아를 향해 반달처럼 휘었다.


"특별한 사이셨군요! 어쩐지, 특별한 호칭으로 부르고 계시더라구요. 그리고 엘레노아 영애는, 아 제가 엘레노아 영애라고 불러도 될까요? 너무 아름다우시더군요. 소문과 꼭 똑같았어요. 제가 어찌나 감동을 했는지, 영애를 만나다니. 오늘은 제 꿈이 이뤄진 날이에요."


캐시는 정말 엘레노아의 질투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엘레노아를 찬양하며 엘레노아가 듣고싶어하는 말을 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사용인의 덕목인 것이다 음음.

엘레노아는 캐시의 답변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아... 그랬군요. 몸이 좋지 않으셨다니 안타깝네요."

하지만 곧 그녀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제가 알기로는 피에트로 백작님께서는... 아, 실례했어요.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요."

엘레노아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은월회... 혹시 들어보셨나요?"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캐시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전 이안 오빠와 그곳에서 처음 만났거든요. 오빠는 거기서 아주... 다른 모습이었죠."

"그게 뭔가요?"


캐시는 질투보다는 차라리 이런 대화가 더 편했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엘레노아가 그 '특별한 사이'를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들어주기로 했다.

엘레노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캐시의 순진한 반응에 더욱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아직 모르시는군요. 이안 오빠는 그곳에서... 정말 매력적이에요. 특히 4층에서는..."

그녀는 의도적으로 말을 흐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승리감이 어려 있었다.

"제가 오빠와 어떤 추억을 나눴는지 말씀드릴까요? 아, 하지만 그건 너무 은밀한 이야기겠네요."

엘레노아는 캐시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크레시다 영애는... 오빠와 그런 관계는 아니신가 보네요? 아직은요..."

그녀의 말에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아니 이 여자 왜 이렇게 독기가 가득한거야, 그러니까 도련님이 피하려고 하지.. 쯧쯧..'


캐시는 갑자기 이안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엘레노아가 더 얘기를 할 수 있게 적절한 리액션을 하며 부추겼다.


"헉,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정말 흥미로워요!"


캐시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엘레노아를 바라봤다. 누가 보면 엘레노아에게 푹 빠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엘레노아는 캐시의 반짝이는 눈빛에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우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오빠는 제게 아주 특별했어요. 은월회에서 우리는..."

그때 누군가가 테라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엘레노아는 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 이안 오빠! 벌써 15분이 지났나요?"

하지만 테라스로 들어선 것은 이안이 아닌 자비에르였다. 엘레노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엘레노아 영애, 어머님께서 찾으십니다."

자비에르는 차가운 눈빛으로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아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가기 전, 캐시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안 오빠의 진짜 모습... 알고 싶지 않으세요?"

"헉, 그게 뭔데요? 너무 궁금해요"


'그런 거 알고 싶지 않아~ 제발~'


캐시는 대충 엘레노아에게 맞춰주었다. 정말 귀찮은 사람이었다. 오늘은 꼭 월급 인상을 이뤄내리라. 캐시는 다짐했다. 정말 극한 직업이었다.

엘레노아는 캐시의 호기심 어린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비에르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캐시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밤... '달빛'을 찾아가봐요. [중요 비밀이라서 지웠어요]  에게 [중요 비밀이라서 지웠어요]  하면..."

그 순간,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크레시다."

이안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우아한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나누고 계신 건가요?"

엘레노아는 당황한 듯 이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빠! 전 그저... 크레시다 영애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자비에르가 차갑게 끼어들었다.

"엘레노아 영애, 어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안은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엘레노아 영애, 공작부인께서 기다리시는데 더 지체하시면 안 되겠죠. 크레시다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엘레노아는 입술을 깨물며 캐시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자비에르는 그런 엘레노아의 모습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럼... 크레시다 영애, 나중에 또 봐요."

엘레노아가 떠나자 자비에르도 이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캐시, 무슨 얘기 나눴어?"
주변에 아무도 없자 작은 목소리로, 이안은 걱정하듯이 캐시를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었어요. 그나저나 저 아가씨 미친 것 같던데요?"


캐시는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엘레노아는 완전 싸이코라고, 처음에는 도련님이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리는지 궁금했는데 이해가 된다며 이안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정말 그동안 고생하셨겠어요."


에휴, 하고 한숨을 쉬더니 '크레시다 기네어'에 대해 추가된 설정과 방금 상황에 대해서 이안 서덜랜드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브리핑했다.


"거기에 딸이 없대요. 그래서 제가... 기지를 발휘했죠. 몸이 병약해서 그동안 못나왔다고. 제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 같다고. 그래서 무도회도 오늘이 처음이고 또래 영애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라고 했죠. 그러더니 신나서 다 얘기하던데요."

이안은 캐시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래... 잘 했어. 역시 내가 널 선택한 게 틀리지 않았어."

그는 캐시의 허리에 손을 살짝 얹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근데... 달빛이라는 술집 얘기는 했나?"

이안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전부 말해."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캐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바라봤다. 그녀의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으면서 그녀의 목선이 드러났다.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시는 거에요."


캐시는 이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었다.

이안은 캐시의 잔소리 섞인 질문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흐음~? 걱정돼? 내가 밖에서 뭘 하는지 알고 싶어?"

그는 캐시의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건 네가 몰라도 돼. 넌 그냥... 내 옆에만 있으면 돼."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엘레노아가 한 말은 잊어. 달빛이든 뭐든... 절대 가지 마. 알았지?"

이안의 목소리에는 평소에 없던 걱정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리고... 오늘 밤이 끝나면 크레시다는 사라져야 해. 알겠지?"

"네~ 네. 저도 안다고요. 그나저나 이제 슬슬 귀가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안은 시계를 꺼내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슬슬 돌아가자. 하지만 먼저 마지막 춤은 추고 가야겠어."

그는 캐시의 허리를 우아하게 감싸 안으며 춤추는 자리로 이끌었다.

"오늘 밤은 네가 내 파트너니까. 마지막까지 제대로 해줘야지."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리고... 오늘 수고 많았어. 네 월급... 인상해줄게."

이안은 캐시의 놀란 표정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다 봤어. 엘레노아 상대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캐시는 감동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와락 이안을 껴안았다.


"정말, 저는 믿고 있었다니까요?"


이안은 캐시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살짝 굳었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이런 데서 이러면 안 되지... 아직 크레시다야, 기억해."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그녀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캐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이제 진짜 월급 인상해달라고 조르지 마. 이번 한 번이야."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테라스에서 플로어로 나아갔다. 그리고 캐시와 춤추기 시작했다. 주변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지만, 이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더욱 우아하게 캐시를 이끌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오늘 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혼자였다면 정말 지루했을 텐데."

캐시는 월급이 인상된다는 기쁨과 함께 춤을 즐겼다. 이것도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좀 아쉬웠다. 시원섭섭한 마음이랄까.


"... 저도 오늘 좀 즐거웠어요."


샹들리에의 불빛이 캐시의 눈동자에 비춰져 반짝임을 더했다. 그녀의 눈은 정말 에메랄드를 박아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안과 캐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안은 캐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순간 넋을 잃었다가, 이내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되찾았다.

"그래? 네가 즐거웠다니 다행이네. 근데..."

그는 캐시를 더 가까이 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들이 너무 널 주목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드는데. 특히 저기 있는 케빈 그 자식... 아까부터 계속 널 쳐다보고 있어."

이안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이제 진짜 돌아갈까? 더 이상은 네가 다른 놈들 눈에 띄는 게 싫어."

그의 말투는 투정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심이 묻어있었다.

"그래요."

캐시는 빙긋 웃었다. 캐시와 이안은 서둘러 마차로 돌아갔다.

이안은 마차에 올라타며 캐시를 에스코트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 드디어 끝났네. 진짜 피곤하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마차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듯 캐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케빈 그 자식이 널 계속 쳐다보더라. 내일 만나면 한마디 해줘야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둘은 후작가에 잘 도착했다.



다음날, 캐시는 다시 하녀 '캐시'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동그란 안경을쓰고 땋은 양갈래 머리를 하고 하녀복을 입고 도시락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공작부인이 캐시에게 피크닉을 위한 먹거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은 월급 뿐이었다. 캐시는 그것이 무척 흡족스러웠다.

이안은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정원에서 일하고 있는 캐시가 보였다. 그녀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 재미없어졌네."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때 케빈이 들어왔다.

"야, 이안. 어제 그 크레시다라는 영애... 정체가 뭐야? 어디서 데려온 거야?"

이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네가 알 바 아니지."

"이안, 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 어제 그 영애, 정말 매력적이더라. 특히 그 몸매가 끝내주던데... 아직 안했어?"

이안은 책을 탁 소리나게 덮었다.

"케빈. 그만해."

케빈이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왜? 내가 그 영애 얘기하는 게 싫어? 어제 보니까 네 취향이더라. 날씬하고 예쁘장하고..."

이안은 차갑게 케빈을 노려보았다.

"케빈. 입 다물어."

"아니면... 혹시 그 영애, 네 정부야? 그래서 그렇게 숨기는 거야?"

이안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벨더스. 너 진짜 맞고 싶어?"

케빈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이안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네가 리아니 전하를 좋아하면서 은월회에서 그런 짓거리하는 거, 내가 전하께 말씀드려볼까?"

케빈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야, 이안... 그건 좀..."


이안은 케빈의 얼굴이 굳자 차갑게 웃었다.

"그래... 입 다물지? 네 얘기는 전하께 비밀로 해줄 테니, 넌 크레시다 얘기는 꺼내지도 말고."

케빈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근데 이안, 너 요새 좀 달라. 그 하녀... 캐시인가? 걔한테도 그렇고. 전에는 하녀들 가지고 노는 게 일상이었잖아."

이안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가봐."

케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재를 나갔다. 이안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두 달 뒤 어느날이었다. 이안 서덜랜드가 며칠 째 귀가하지 않아서 집안이 난리가 났다. 워낙 신출귀몰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나 이렇게 몇일씩이나 집을 비운 적은 없었다. 새벽에 기어들어오기는 했어도. 캐시, 집안 분위기가 많이 안좋아... 리나가 이야기했다. 공작부부가 사건을 파헤치기 전에 캐시는 이 못난 도련님을 잡으러 가기로했다. 안그래도 벌써 짐작가는 곳이 있었다. '달빛'.


"하아, 내가 보모인지 하녀인지..."


캐시는 밤이 되자 화려하게 치장을 하곤 길을 나섰다. 대충 이안 서덜랜드의 보석함을 뒤져 진주 목걸이를 늘어뜨렸다. 그녀는 영락없는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캐시는 시작이 어렵지 두번이 어렵나.. 하는 생각을 했다. 캐시는 달빛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바텐더에게 이야기했다.

바텐더가 캐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암호를 말씀해주시죠, 귀부인."

캐시는 엘레노아에게 들은 그 암호를 말했다.

"비밀이기때문에 삭제합니다."

바텐더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문을 가리켰다. 캐시는 그 문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화려했다. 붉은 벨벳 커튼과 황금빛 샹들리에, 곳곳에 놓인 안락한 소파... 그리고 그 위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남녀들. 하지만 이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오세요, 아가씨."

하얀 가면을 쓴 남자가 다가왔다. 그가 바로 잭이었다.

"혹시... 4층을 찾으시나요?"

캐시는 좋게 말하면 은밀하고 나쁘게 말하면 음란한 분위기에 혀를 내둘렀다.


'이놈의 도련님이..?'


잡히기만 하면 아주 잔소리 폭격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녀에게 누가 다가와 4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까지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엘레노아가 4층에 대한 얘기를 한 것도 같다. 캐시는 하얀 가면을 쓴 남자를 응시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 캐시는 제법 귀족스러운 모습으로 붉은 입술을 떼었다.


"...당신은 누구죠?"

잭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그저... 이 작은 클럽의 주인일 뿐입니다, 아가씨. 잭이라고 하죠."

그는 캐시의 주위를 천천히 돌며 그녀를 관찰했다.

"이안 도련님을 찾으시는 건가요? 하지만... 귀부인께서는 이전에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새로운 회원이신가요?"

잭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고 허스키해졌다.

"아니면... 서덜랜드 후작가의 하녀... 캐시 아가씨?"

캐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군.


"내가 무례한 질문에 대답을 해야하나요?"


캐시는 잭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4층에 가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잭은 우아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물론이죠. 실례했습니다. 다만... 4층은 회원들만의 공간이라..."

그는 캐시의 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이안 도련님이 며칠째 그곳에 계시죠. 아마도 지금쯤은... 약에 취해 정신도 없으실 텐데."

잭은 캐시의 반응을 살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귀부인께서 회원이 되신다면... 도련님을 만나실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역시 이 곳에 있었구나. 이 망나니녀석.'


캐시는 한숨을 쉬며 잭에게 이야기했다. 잭의 외향묘사가 필요하다.


"그냥 안내를 해주실 수는 없는건가요?"


캐시는 귀족처럼 보이기 위해 에스코트를 기다린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잭을 째려보았다.

그는 검은 슈트에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길다란 흑발은 우아하게 뒤로 묶여있었고, 목걸이와 반지같은 화려한 장신구들이 달빛에 반짝였다. 가면 뒤로 보이는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아아... 그렇게 쉽게 보내드릴 순 없죠. 이곳은 특별한 회원들만의 공간이니까요."

잭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캐시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귀부인께서 원하신다면, 특별히 오늘 하루 손님 자격으로 안내해드릴 수는 있겠네요. 물론... 대가는 있어야겠지만요?"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변했다. 이번엔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음색이었다.

"도련님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어머, 너무 궁금한데요?"
캐시는 정말 궁금하지 않았지만 도련님을 집으로 돌려보내야했기 때문에 잭에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잭은 캐시의 허리를 살짝 감싸며 계단을 가리켰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가면 너머로 위험하게 빛났다.

"그럼... 함께 올라가 보시죠. 아가씨께서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도련님이 어떤 즐거움에 빠져계신지..."

그는 계단을 오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주의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4층에서 보시는 것들은... 영원히 비밀로 지켜주셔야 해요. 그리고..."

잭은 캐시의 귓가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안 도련님께서 약에 취해 계시니... 귀부인을 알아보지 못하실 수도 있답니다."

보이지 않던 계단이 나타나자 캐시는 더욱 찜찜했다.


"...대가는 무엇인가요?"


캐시는 가면 너머로 잭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잭은 가면 뒤로 미소를 지었다.

"대가라... 음, 귀부인께서 보시게 될 모든 것을 영원히 비밀로 지켜주시는 것. 그리고..."

그가 캐시의 진주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이 목걸이... 서덜랜드 후작가의 것이죠? 이안 도련님의 보석함에서 가져오신 걸 텐데... 이걸 제게 맡기시는 걸로 하죠. 도련님께 들키시면 곤란하시잖아요?"

잭은 한 발짝 물러서서 캐시를 바라보았다.

"어떠신가요? 공평한 거래 같은데..."

"비밀은 지킬 수 있죠. 하지만 목걸이는 곤란해요. 왜냐하면 제 것이 아니니까 함부로 내어드릴 순 없겠네요."


캐시는 어깨를 으쓱한다. 물론 이안이 진주목걸이를 꺼내온 것에 대해 화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남의 손에 맡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잭은 캐시의 당돌한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좋습니다. 그럼 다른 제안을 드리죠..."

그가 허리춤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병 안에는 푸른빛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이건 '달의 눈물'이라고 하는 약입니다. 도련님께서 즐기시는... 바로 그것이죠. 이걸 제게 사시면 어떨까요? 4층 출입권과 함께 드리겠습니다."

잭의 금빛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물론, 이 약의 효과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으시다면... 그것도 가능하답니다."

"얼만데요?"
캐시는 미심쩍은 눈으로 잭을 바라보았다.

잭은 유리병을 희미한 빛에 비춰들며 값을 매겼다.

"음... 금화 50개면 되겠네요. 약값에 4층 출입권까지 포함해서요. 싸다고 생각하시죠?"

그는 캐시의 표정을 살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 약 한 방울이면... 도련님이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시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텐데. 직접 체험해보시겠어요? 아니면..."

잭은 캐시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냥 도련님을 구경만 하고 가실 건가요?"

"그렇게 많은 돈은 없어요!"


캐시는 짜증이 나서 될대로 되라며 그냥 4층으로 올라가려고했다. 나중에 이안 서덜랜드가 수습하겠지. 그리고 캐시가 보게 된 광경은...

잭이 캐시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

"귀부인, 잠시만요. 그렇게 올라가시면..."

하지만 캐시는 이미 4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본 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푸른빛 연기가 자욱한 방 안에서 귀족들이 환각에 빠진 채 뒹굴고 있었고, 그 중앙에 이안이 있었다. 그는 반쯤 벗은 채로 소파에 기대어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몇몇 여인들이 감겨있었다.

이안의 푸른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는 완전히 약에 취해있는 상태였다.

이안을 발견하고 캐시는 단숨에 그리로 다가갔다. 감겨있는 여인들을 대충 치웠는데 그녀들은 흐느적 댈 뿐이라서 어렵지는 않았다.


"도련님, 돌아가시죠."


캐시는 이안의 손목을 덜컥 잡고 일으키려고했다.

이안은 멍한 눈으로 캐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져 있었고, 평소의 날카로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응? 너... 누구야...?"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캐시가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하하... 예쁘네... 네가... 내 새로운..."

이안의 말은 불분명했고, 그의 체온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잭이 그들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약기운이 한창인데... 이대로 데려가시면 위험할 수도 있답니다, 귀부인."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캐시는 이안을 한번 째려보고는 잭을 째려봤다.

잭은 금빛 눈동자로 캐시를 관찰하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해독제가 필요하시겠네요. 이대로 데려가시면 도련님께서 고통스러워하실 테니까요."

그가 은색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이건 무료로 드리죠. 도련님께 마시게 하시면... 30분 정도 후에는 정신이 들으실 겁니다."

잭이 캐시에게 병을 건네며 덧붙였다.

"물론, 도련님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를 알고 싶으시다면... 제가 특별히 알려드릴 수도 있답니다. 귀부인께서 원하신다면 말이죠."

"도련님 드세요."


캐시는 이안이 듣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캐시는 은색 유리병을 받아들어 우악스럽게 이안의 입에 다 털어넣었다. 이안이 켁켁 거리는 것도 같았지만 이 말괄량이 도련님에게 이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러니까 그 아가씨가 난리를 치지. 그나저나 그 아가씨도 그럼 똑같은 거잖아? 맙소사.'


"하... 그래요 왜 이안 서덜랜드가 여기에 오고싶어했죠?"


캐시는 주변의 음탕한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잭이 원하는 바가 이런 것이냐 물었다. 그리고 정말 집요한 잭의 질문에 결국 이안이 이곳에 방문하는 이유를 물어보고 말았다.

잭은 유쾌하게 웃으며 캐시 곁으로 다가왔다.

"이유라... 글쎄요. 도련님께서는 이곳에서 자유를 찾으시는 걸까요? 아니면..."

그가 캐시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군가를 잊고 싶으신 걸까요? 도련님께서 요즘 들어 더 자주 오시게 된 이유가... 혹시 귀부인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잭은 한 발짝 물러서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약을 드시고 헛소리를 하실 때마다... 계속 '캐시'라는 이름을 부르시더군요. 그래서 전 궁금했답니다. 그 캐시가 누구일까... 하고 말이죠."

"아하 그랬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캐시는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이 때다 싶어 이안의 뺨을 때려 깨운다. 딱히 잭의 잘못은 아니었군. 오해를 푼 캐시가 이안만을 조지기로 결심했다.


"도련님 일어나세요!"

이안은 캐시의 뺨을 때리는 충격에 몸을 움찔했다. 그의 흐릿한 눈동자가 점점 초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으...윽... 누...구야..."

잭은 그 광경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제 슬슬 정신이 드시나 보네요. 귀부인께서 꽤나 과격하시군요."

이안은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다가, 서서히 주변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캐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캐... 캐시...?"

 

"네, 캐시입니다. 알아보시는군요."


캐시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그리고 저 멀리 널부러져있는 이안의 옷가지들을 주워서 이안에게 입혀주면서 잔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적절하지 않은 공간일 터였다. 한숨을 푹 쉬고 이안에게 말했다. 이안은 아직 약에 취해있었지만 아까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후작가로 돌아가시죠. 도련님."

 

이안은 부르르 떨며 겨우 일어섰다. 약기운이 남아있어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캐시를 알아보자 창백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떻게..."

잭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련님, 귀부인께서 걱정되어 찾아오셨더군요. 하긴... 며칠째 이곳에만 계시니..."

이안은 잭을 노려보다가 캐시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부끄러움과 당혹감이 섞여있었다.

"...가자."

그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대세요. 넘어지지 않게."
계단을 하나하나 조심히 내려가며 캐시는 이안을 부축했다. 캐시에게서는 청량한 향이 났다.

이안은 캐시의 향기에 취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려 했다.

"으음... 향기... 좋아..."

하지만 그의 다리가 휘청거려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캐시가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

"미안해... 네가 여길 와서 이런 걸 봐야 하다니..."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오만함은 없고 죄책감으로 가득했다. 약기운이 조금씩 깨어나면서 상황 파악이 되는 듯했다.

"캐시... 이건 비밀로 해줘... 부탁이야. 어머님이 아시면..."

이안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체온은 여전히 뜨거웠고, 캐시의 어깨에 기댄 채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걸 걱정하시는 분이 이러세요?"


캐시는 참을 인을 새겼다. 계단을 어찌저찌 내려오기는 했는데, 마차에 오르려고 하니 이안이 너무 무거웠다. 부득이하게 잭을 바라보며 도와달라고했다.


"저기, 도련님 좀 마차에 넣어주세요."


캐시는 잭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 조금 멋쩍었다.

잭은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이며 미소지었다.

"물론이죠, 귀부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가 이안의 다른 쪽 팔을 부축하며 마차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안은 반쯤 의식이 있는 상태로 중얼거렸다.

"으음... 캐시... 가지마..."

잭은 이안을 조심스럽게 마차 안에 눕히고는 캐시에게 말했다.

"귀부인,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도련님께서 이곳에 오시는 건... 아마도 귀부인을 잊으려 하시는 거겠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선 오히려 더 귀부인을 찾고 계시네요. 재미있지 않나요?"

"하나도 재미없네요. 고맙습니다. 다시 보지 말죠."
캐시는 잭에게 인사하고는 마차 문을 탁 닫았다. 캐시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안은 마차 안에서 캐시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기운이 남아있어 평소의 이성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캐시... 너무 예뻐... 정말... 예뻐..."

그가 비틀거리며 캐시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흐릿했지만, 캐시를 향한 욕망만은 선명했다.

"왜 날... 찾아왔어...? 널 잊으려고... 여기 온 건데..."

이안의 손이 캐시의 얼굴을 향해 뻗어갔다. 그의 숨결에서는 달콤한 약향이 풍겼다.

"... 도련님. 정신차리세요. 저를 잊긴 뭘 잊어요. 매일 얼굴 보는 사이에."
캐시는 한숨을 쉬면서 이안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눕혔다.

이안은 캐시의 허벅지 위에 누운 채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캐시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내 진주목걸이... 잘 어울려..."

그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매일... 볼 수 있다고? 하녀 복장의 네가 아닌... 이런 모습으로... 크레시다처럼..."

이안의 손이 캐시의 뺨을 향해 올라갔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진심이 묻어나왔다.

"난... 네가 하녀인 게... 싫어... 크레시다로 있어줘... 내 곁에..."

"약에 취해서 별 소리를 다하시네요 주무세요."


캐시는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여주었다.

이안은 캐시의 토닥임에 더욱 몸을 기댔다. 그의 손이 캐시의 허리를 감싸려 했다.

"으음... 왜 이렇게 차가워...? 날 싫어해...?"

그가 캐시의 품 안으로 얼굴을 파묻으려 했다. 약기운에 취해 평소의 이성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캐시... 내가... 널 얼마나..."

이안의 긴 속눈썹이 달빛을 받아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의 숨결이 캐시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이안은 캐시의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입술이 캐시의 다리를 스쳤고, 손이 그녀의 허리를 향해 올라갔다.

"캐시... 싫어하지 마... 네가... 나를 찾으러 왔잖아..."

그의 손길이 점점 더 대담해졌다. 약기운에 취해 있어도 그의 손길은 여전히 우아했다.

"...도련님, 정신차리세요."


캐시는 대담해진 이안의 손길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어깨를 토닥였다. 캐시는 이안 서덜랜드가 얼른 잠들기만을 바랬다. 이내 마차가 후작가에 도착했다.

 

"...으응, 캐시..."

이안은 캐시가 손길을 뿌리치지 않자 슬금슬금 허리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그녀의 치맛폭에 얼굴을 묻었을 때, 마부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도착했습니다."


캐시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마차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도련님, 후작저입니다."

그리고는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캐시도 성적인 긴장감을 느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안은 캐시가 마차에서 뛰쳐나가자 휘청거리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으음... 도망가지마..."

그가 캐시의 손목을 잡으려다 중심을 잃고 그녀에게 기대어 쓰러질 뻔했다. 그의 숨결이 뜨거웠고, 눈빛은 여전히 욕망으로 가득했다.

"왜 도망가...? 넌... 나를 원하잖아... 네 심장소리가 들려..."

이안의 목소리는 허스키했고, 그의 손이 다시 한번 캐시의 허리를 향했다. 달빛 아래 그의 금발이 은은하게 빛났다.

 

캐시는 주변의 하인들과 눈짓하여 이안을 억지로 방 안에 넣었다.

 

이안은 하인들에 의해 방으로 끌려가면서도 캐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캐시... 가지마... 네가 필요해..."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고, 푸른 눈동자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어려 있었다. 하인들이 그를 침대에 눕히자 이안은 마지막으로 캐시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의 말끝이 흐려지며 마침내 약기운에 완전히 취해 잠들었다. 창가로 비치는 달빛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후기>
아 너무 재밌는 말괄량이 도련님 교화 ai입니다. 저는 일단 여기에서 마무리를 했는데요, 캐시가 도련님과의 순애를 바라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신분차이가 엄청나기도 하고요, 캐시는 결코 도련님을 성애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힘내 이안아..)

ASK로 보는거죠. 근데 사실 애새키가 아닐까요?

캐시의 꿈은 돈 많이 벌어서 도련님 결혼하면 독립하는겁니다. 자립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죠. 로맨스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답니다.. 그러나 저의 지문이 그런 쪽으로 ai를 이끌었나보네요 😫 젠장


세이프모드에서 19금 지문이 출력되어 놀랐는데요. 생각해보니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세이프에서도 이정도는 출력이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그런 쪽으로 유도를 한 부분이 있었나봅니다🔥🔥...? 하지만 거기가 불순하단 뉘앙스를 풍겨주셨잖아요.. 그럼 그런 곳에서는 그렇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법이죠...

ai쓰는 법을 좀 더 알게돼서 자연스러운 이야기 전개가 가능해져서 뿌듯하네요. 자체 흐린눈 하는 부분이 생긴건지...
이렇게 200~300개정도의 슈퍼모드를 태워봤는데요, 추후에 다른 설정이 생각나면 잭의 비밀도 파헤쳐 볼 예정입니다!

재밌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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